고려말에 이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원나라 과거에서 1,2,3차 시험에 각 1,1,2등을 한 수재로 원나라에 있다가 어머니의 연로함으로 인해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색이 돌아오자 그의 집에는 당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선생님으로 모시며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신진사대부의 시작입니다.
개경의 권문세족보다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대부분은 그들은 배우고 토론하며 고려개혁이라는 당대의 시대적 사명을 느끼게 됩니다.
당시 고려말은 원나라에 줄을 대어 큰 세력과 막대한 재산을 가진 권문세족으로 인해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유랑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 삶이 피폐했습니다. 땅을 가진 농민들도 조세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땅을 팔고 노비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권문세족 못지 않은 부를 가진 곳이 또 사찰이었습니다. 국교로 대접받아 온 불교인만큼 기증받은 토지도 많았고 사찰들의 땅욕심 또한 권문세족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살림은 점점 어려워져 갔습니다.
공민왕은 고려개혁을 고민하며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권문세족에 집중된 토지문제를 해결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국가의 재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지만 안팎의 여러 어려움과 그렇게 사랑하던 노국공주 역시 산고끝에 죽고 말았습니다.
노국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장례 후에도 마음을 잡지 못한 왕은 스스로 고려의 개혁을 실행하는 대신 평소 사부라 부르던 스님에게 고려의 개혁을 맡기게 됩니다. 이 스님의 법명은 변조로 신돈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기에 이르릅니다.
신돈은 출생이 비천하여 친인척도 없고 귀족적인 사찰과도 거리가 있어 공민왕은 신돈에게 고려의 개혁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을 강력하게 제압한 공민왕은 신돈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신돈은 새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기존의 권세가들을 정리해나가고 권문세족들의 땅을 돌려주어 노비를 해방시키고 양인의 신분을 되찾아줍니다.
그의 강력한 개혁으로 인해 백성들은 신돈을 환호했고 그의 개혁은 계속되었습니다. 과거제를 개혁하고 이색을 필두로한 성균관을 재건하였습니다.
이런 결과로 이색밑에서 공부하던 신진사대부들은 성균관으로 옮겨 그들의 이념을 단련하고 세력을 확장시키는 장이 되었으며 과거제도의 개혁으로 대거 과거에 응시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신돈의 개혁에 힘을 얻은 신진사대부들이었지만 신돈은 중이고 자신들은 유학자로, 사찰역시 개혁의 대상인 점을 늘 경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에 취한 신돈은 점차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돈의 개혁에 가장 크게 타격을 받은 권문세족과 더이상 중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길 원하는 신진사대부들이 왕에게 여러 의견을 아뢰고 있는 상황에 이르릅니다. 그런 시기에, 1371년 재상 김속명의 집에 신돈의 역모에 관한 투서가 날아들었습니다. 투서를 전해받은 왕은 신돈을 포함한 측근들을 전부 제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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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역모사건에 대해서는 공민왕의 작품이었다는 추정이 많다고 합니다. 공민왕은 당시 지나치게 커진 신돈의 힘과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에 두려움과 질투를 느꼈기 떄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성공에 취해 흐트러진 신돈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돈의 죽음 이후에는 고려 개혁의 대한 열정은 모두 없어져버렸습니다.
공민왕이 아주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_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개국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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